월 중순까지 학내에서의 집회와 시위에 주력하고 있던 학생운동은 4월말 병영집체훈련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오히려 예의 ‘안보 논리’를 이용한 정권의 대대적인 여론 조작 공세에 밀렸다. 학생과 시민, “학내 농성과 교내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학생 대중이 점차 식상함에 빠져 운동선상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단계적 투쟁론을 비판하는 한편, 마산에서는 오후의 경남대 ‘반정부 성토 대회’ 이후 마산 시내 전역에서 학생과 시민이 함께 ‘민주 회복’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군사독재가 아닌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적 기본권이 확보되고 이에 따라 기층 민중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증개 될 것”, 파출소, 최강의 보병 부대인 노태우의 9사단 병력 6천명을 동원하여 ‘12..3) ‘마이니찌’의 불길한 예견은 정확한 것이었. , ‘통대 선출 분쇄’, 특히 당시의 중?고등학생들(이들이 이후 80년대 학생운동의 주체다) 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학생과 시민이 하나가 ......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1. 유신붕괴의 직접 도화선 ― 부?마 항쟁
10월 15일 오후, 부산대 도서관에 반유신 독재 궐기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지면서 시작된 시위는 10월 16일,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의 맹렬한 함성으로 부산 시내를 휩쓸기 시작했다. 기동 경찰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는 가운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시위대는 시민들과 합세하여 남포동-시청앞-대청동-충무동을 잇는 부산의 중심가를 돌며 파출소, 신문사에 투석?방화하는 양태로 다음날 새벽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다음날인 10월 17일 (유신 7주년 기념일) 오후, 시내 중심가에 결집한 학생들은 ‘유신철폐’,‘독재정권 퇴진’,‘언론자유’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과 시민, 부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시위대로 변했고, 충무 파출소, KBS 부산 방송국, 서구청, 부산 세무서 등 독재정권의 ‘상징적’ 건물들이 분노한 그들에 의해 부서지거나 불태워졌으며, 급기야 항쟁의 물결은 해군 도시 진해와 자유 무역항 마산에까지 도달하였다. 이익고 17일 밤 11시를 기해서 부산 시내에는 요소 요소에 군이 진주해서 배치되기 시작하였고, 임시 긴급 뉴스에서는 밤 11시를 통금으로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밤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독재 정권의 ‘원시적’ 폭력 앞에 머리 숙일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10월 18일 계엄령 하에서도 부산 중심가에서는 ‘계엄령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마산에서는 오후의 경남대 ‘반정부 성토 대회’ 이후 마산 시내 전역에서 학생과 시민이 함께 ‘민주 회복’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파괴되었다.
학생과 시민이 하나가 된 이같은 군중 시위는 처음 부산대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시민과 학생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한국적 시위 양식을 보여 주면서 79년의 학생운동과 70년대를 사실상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 마산 등 경남 남부 일원을 강타한 항쟁의 거친 해일은 마침내 10?26을 촉박 시켰다.
2. 10?26 ; 그날 이후
어느 정도까지는 ‘예견된’ 종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26 - 유신의 붕괴는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최초의 충격이 ‘어리둥절함’을 거쳐 차츰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했을 때, 사회의 각 계급, 집단, 정파는 자신들의 입지를 새로이 모색해야만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국민 대다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민주화의 서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여년에 걸친 군사 독재의 장기 집권, 특히 72년 유신 이후 7년여의 기간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민주?민권마저 철저히 유린된 시기였던 만큼, 억눌렸떤 민주화의 열망은 국민 누구의 가슴에나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와 소수의 독점 재벌, 유신 체제의 중심 관료들, 그리고 미국에 있어서 그것은 그들 모두의 이해 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정치 원력의 ‘공백’이었다. 그들은 반동의 재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10?26의 발생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 특히 당시까지 유신체제의 꽉 죄여진 교육 제도 아래서 ‘유신만이 살 길’ 이라고 믿고 있었던 많은 학생들, 특히 당시의 중?고등학생들(이들이 이후 80년대 학생운동의 주체다) 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3. 반동의 시작 - 12.12 쿠테타
비상계엄 하의 한국에서는…… 군 수뇌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육사 11기를 졸업한 실력자로 동기생이 실전 부대 사단 병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 사건(10.26)의 최고 책임자로서 군 질서 유지의 중심 인물이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79.11.3)
‘마이니찌’의 불길한 예견은 정확한 것이었다. 11월 24일의 YMCA사건( 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 기독교인, 재야 인사들이 YMCA에서 열리는 결혼식을 활용하여 ‘통대 선출 저지 국민 대회’를 개최, ‘통대 선출 분쇄’,‘유신 독재 완전 타도’ 등을 요구한 사건 (96명이 검거됨)을 거친 유신 잔여 세력은 12월 6일 계엄군의 엄호 하에 체육관 선거를 통해 최규하의 직함에서 ‘권한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잇달아 12월 8일 저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는 등 서서히 번지기 시작하는 민주화의 열기를 무마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반동은 군부로부터 시작되었다. 10.26 이후 권력의 공백기에서 호시 탐탐 정권 탈취를 노리던 군부 강경파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명분-10.26 사건의 공범)를 빌미로 38선 부근의 제1군 20사단, 최강의 보병 부대인 노태우의 9사단 병력 6천명을 동원하여 ‘12.12 숙군 구테타’를 감행하였다. 이는 정권 장악을 둘러싼 군부내의 권력 투쟁으로, 이후 권력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실상의 전환점이었으며, 80년대를 반동의 시기로 몰아가는 서막이었다.
4. ‘ 서울의 봄 ’ - 거리로, 거리로 !
군부 소장파의 정권 장악 의도가 더욱 노골화되자 학새운동 내부에서는 10.26 이후의 ‘안이한’ 정제 인식과 투쟁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투쟁 방향과 전술이 제기되고 있었다. 4월 중순까지 학내에서의 집회와 시위에 주력하고 있던 학생운동은 4월말 병영집체훈련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오히려 예의 ‘안보 논리’를 이용한 정권의 대대적인 여론 조작 공세에 밀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면적 투쟁론’이 대두되었다. 복학생 중심의 전면적 투쟁론자들은, “군사독재가 아닌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적 기본권이 확보되고 이에 따라 기층 민중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증개 될 것”,“지금 우리 운동의 목표는 현실 정치인들의 집권에 두고 그 주체를 정치적 각성층(재야 정치인, 지식인, 학생, 성직자 등)으로 설정한다”는 것 등에서는 ‘단계적 투쟁론’과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으니, “학내 농성과 교내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학생 대중이 점차 식상함에 빠져 운동선상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단계적 투쟁론을 비판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민주 회복은 가두 정치 투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학생과 시민, 부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시위대로 변했고, 충무 파출소, KBS 부산 방송국, 서구청, 부산 세무서 등 독재정권의 ‘상징적’ 건물들이 분노한 그들에 의해 부서지거나 불태워졌으며, 급기야 항쟁의 물결은 해군 도시 진해와 자유 무역항 마산에까지 도달하였다.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1. 18여년에 걸친 군사 독재의 장기 집권, 특히 72년 유신 이후 7년여의 기간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민주?민권마저 철저히 유린된 시기였던 만큼, 억눌렸떤 민주화의 열망은 국민 누구의 가슴에나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26 이후 권력의 공백기에서 호시 탐탐 정권 탈취를 노리던 군부 강경파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명분-10.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국민 대다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민주화의 서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서울의 봄 ’ - 거리로, 거리로 ! 군부 소장파의 정권 장악 의도가 더욱 노골화되자 학새운동 내부에서는 10. 11월 24일의 YMCA사건( 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 기독교인, 재야 인사들이 YMCA에서 열리는 결혼식을 활용하여 ‘통대 선출 저지 국민 대회’를 개최, ‘통대 선출 분쇄’,‘유신 독재 완전 타도’ 등을 요구한 사건 (96명이 검거됨)을 거친 유신 잔여 세력은 12월 6일 계엄군의 엄호 하에 체육관 선거를 통해 최규하의 직함에서 ‘권한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잇달아 12월 8일 저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는 등 서서히 번지기 시작하는 민주화의 열기를 무마시키려 들었다. 4.26 이후 권력의 공백기에서 호시 탐탐 정권 탈취를 노리던 군부 강경파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명분-10.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면적 투쟁론’이 대두되었다. 2. 그러나, 반동은 군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충격이 ‘어리둥절함’을 거쳐 차츰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했을 때, 사회의 각 계급, 집단, 정파는 자신들의 입지를 새로이 모색해야만 했 그리고 부산, 마산 등 경남 남부 일원을 강타한 항쟁의 거친 해일은 마침내 10?26을 촉박 시켰다. 다음날인 10월 17일 (유신 7주년 기념일) 오후, 시내 중심가에 결집한 학생들은 ‘유신철폐’,‘독재정권 퇴진’,‘언론자유’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10.. 다음날인 10월 17일 (유신 7주년 기념일) 오후, 시내 중심가에 결집한 학생들은 ‘유신철폐’,‘독재정권 퇴진’,‘언론자유’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밤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그러나, 반동은 군부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동 경찰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는 가운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시위대는 시민들과 합세하여 남포동-시청앞-대청동-충무동을 잇는 부산의 중심가를 돌며 파출소, 신문사에 투석?방화하는 양태로 다음날 새벽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반동의 재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익고 17일 밤 11시를 기해서 부산 시내에는 요소 요소에 군이 진주해서 배치되기 시작하였고, 임시 긴급 뉴스에서는 밤 11시를 통금으로 알렸다.26)의 최고 책임자로서 군 질서 유지의 중심 인물이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복학생 중심의 전면적 투쟁론자들은, “군사독재가 아닌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적 기본권이 확보되고 이에 따라 기층 민중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증개 될 것”,“지금 우리 운동의 목표는 현실 정치인들의 집권에 두고 그 주체를 정치적 각성층(재야 정치인, 지식인, 학생, 성직자 등)으로 설정한다”는 것 등에서는 ‘단계적 투쟁론’과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으니, “학내 농성과 교내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학생 대중이 점차 식상함에 빠져 운동선상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단계적 투쟁론을 비판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민주 회복은 가두 정치 투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학생과 시민, 부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시위대로 변했고, 충무 파출소, KBS 부산 방송국, 서구청, 부산 세무서 등 독재정권의 ‘상징적’ 건물들이 분노한 그들에 의해 부서지거나 불태워졌으며, 급기야 항쟁의 물결은 해군 도시 진해와 자유 무역항 마산에까지 도달하였다.3) ‘마이니찌’의 불길한 예견은 정확한 것이었다.26 사건의 공범)를 빌미로 38선 부근의 제1군 20사단, 최강의 보병 부대인 노태우의 9사단 병력 6천명을 동원하여 ‘12. 학생과 시민이 하나가 된 이같은 군중 시위는 처음 부산대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시민과 학생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한국적 시위 양식을 보여 주면서 79년의 학생운동과 70년대를 사실상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들은 반동의 재건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독재 정권의 ‘원시적’ 폭력 앞에 머리 숙일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익고 17일 밤 11시를 기해서 부산 시내에는 요소 요소에 군이 진주해서 배치되기 시작하였고, 임시 긴급 뉴스에서는 밤 11시를 통금으로 알렸다. 반동의 시작 - 12. 10. 10월 18일 계엄령 하에서도 부산 중심가에서는 ‘계엄령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마산에서는 오후의 경남대 ‘반정부 성토 대회’ 이후 마산 시내 전역에서 학생과 시민이 함께 ‘민주 회복’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파괴되었다. 3.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1. 4.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그러나 군부와 소수의 독점 재벌, 유신 체제의 중심 관료들, 그리고 미국에 있어서 그것은 그들 모두의 이해 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정치 원력의 ‘공백’이었다. 그러나 군부와 소수의 독점 재벌, 유신 체제의 중심 관료들, 그리고 미국에 있어서 그것은 그들 모두의 이해 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정치 원력의 ‘공백’이었다. 이는 정권 장악을 둘러싼 군부내의 권력 투쟁으로, 이후 권력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실상의 전환점이었으며, 80년대를 반동의 시기로 몰아가는 서막이었다.26)의 최고 책임자로서 군 질서 유지의 중심 인물이다. ‘ 서울의 봄 ’ - 거리로, 거리로 ! 군부 소장파의 정권 장악 의도가 더욱 노골화되자 학새운동 내부에서는 10. 유신붕괴의 직접 도화선 ― 부?마 항쟁 10월 15일 오후, 부산대 도서관에 반유신 독재 궐기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지면서 시작된 시위는 10월 16일,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의 맹렬한 함성으로 부산 시내를 휩쓸기 시작했다. 10?26 ; 그날 이후 어느 정도까지는 ‘예견된’ 종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26 - 유신의 붕괴는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10?26 ; 그날 이후 어느 정도까지는 ‘예견된’ 종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26 - 유신의 붕괴는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반동의 시작 - 12. 그리고 부산, 마산 등 경남 남부 일원을 강타한 항쟁의 거친 해일은 마침내 10?26을 촉박 시켰다. 이는 정권 장악을 둘러싼 군부내의 권력 투쟁으로, 이후 권력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실상의 전환점이었으며, 80년대를 반동의 시기로 몰아가는 서막이었다. 11월 24일의 YMCA사건( 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 기독교인, 재야 인사들이 YMCA에서 열리는 결혼식을 활용하여 ‘통대 선출 저지 국민 대회’를 개최, ‘통대 선출 분쇄’,‘유신 독재 완전 타도’ 등을 요구한 사건 (96명이 검거됨)을 거친 유신 잔여 세력은 12월 6일 계엄군의 엄호 하에 체육관 선거를 통해 최규하의 직함에서 ‘권한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잇달아 12월 8일 저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는 등 서서히 번지기 시작하는 민주화의 열기를 무마시키려 들었다. 2. 학생과 시민이 하나가 된 이같은 군중 시위는 처음 부산대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시민과 학생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한국적 시위 양식을 보여 주면서 79년의 학생운동과 70년대를 사실상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밤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한편 10?26의 발생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 특히 당시까지 유신체제의 꽉 죄여진 교육 제도 아래서 ‘유신만이 살 길’ 이라고 믿고 있었던 많은 학생들, 특히 당시의 중?고등학생들(이들이 이후 80년대 학생운동의 주체다) 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국민 대다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민주화의 서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2 쿠테타 비상계엄 하의 한국에서는…… 군 수뇌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육사 11기를 졸업한 실력자로 동기생이 실전 부대 사단 병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 사건(10.26 이후의 ‘안이한’ 정제 인식과 투쟁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투쟁 방향과 전술이 제기되고 있었다. 3. 기동 경찰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는 가운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시위대는 시민들과 합세하여 남포동-시청앞-대청동-충무동을 잇는 부산의 중심가를 돌며 파출소, 신문사에 투석?방화하는 양태로 다음날 새벽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12 쿠테타 비상계엄 하의 한국에서는…… 군 수뇌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육사 11기를 졸업한 실력자로 동기생이 실전 부대 사단 병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 사건(10. (일본 『마이니찌 신문』79.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독재 정권의 ‘원시적’ 폭력 앞에 머리 숙일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12 숙군 구테타’를 감행하였다. 복학생 중심의 전면적 투쟁론자들은, “군사독재가 아닌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적 기본권이 확보되고 이에 따라 기층 민중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증개 될 것”,“지금 우리 운동의 목표는 현실 정치인들의 집권에 두고 그 주체를 정치적 각성층(재야 정치인, 지식인, 학생, 성직자 등)으로 설정한다”는 것 등에서는 ‘단계적 투쟁론’과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으니, “학내 농성과 교내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학생 대중이 점차 식상함에 빠져 운동선상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단계적 투쟁론을 비판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민주 회복은 가두 정치 투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전제하고.12 숙군 구테타’를 감행하였다. 한편 10?26의 발생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 특히 당시까지 유신체제의 꽉 죄여진 교육 제도 아래서 ‘유신만이 살 길’ 이라고 믿고 있었던 많은 학생들, 특히 당시의 중?고등학생들(이들이 이후 80년대 학생운동의 주체다) 에게 당혹감과 배신감으로 다가왔다.26 이후의 ‘안이한’ 정제 인식과 투쟁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투쟁 방향과 전술이 제기되고 있었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면적 투쟁론’이 대두되었다. 유신붕괴의 직접 도화선 ― 부?마 항쟁 10월 15일 오후, 부산대 도서관에 반유신 독재 궐기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지면서 시작된 시위는 10월 16일,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의 맹렬한 함성으로 부산 시내를 휩쓸기 시작했다. 최초의 충격이 ‘어리둥절함’을 거쳐 차츰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했을 때, 사회의 각 계급, 집단, 정파는 자신들의 입지를 새로이 모색해야만 했.11. 4월 중순까지 학내에서의 집회와 시위에 주력하고 있던 학생운동은 4월말 병영집체훈련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오히려 예의 ‘안보 논리’를 이용한 정권의 대대적인 여론 조작 공세에 밀렸다.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26 사건의 공범)를 빌미로 38선 부근의 제1군 20사단, 최강의 보병 부대인 노태우의 9사단 병력 6천명을 동원하여 ‘12... 80년학생운동이전의 역사와 사건들 -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자료 JF . 10월 18일 계엄령 하에서도 부산 중심가에서는 ‘계엄령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마산에서는 오후의 경남대 ‘반정부 성토 대회’ 이후 마산 시내 전역에서 학생과 시민이 함께 ‘민주 회복’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파괴되었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79. 4월 중순까지 학내에서의 집회와 시위에 주력하고 있던 학생운동은 4월말 병영집체훈련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오히려 예의 ‘안보 논리’를 이용한 정권의 대대적인 여론 조작 공세에 밀렸다.3) ‘마이니찌’의 불길한 예견은 정확한 것이었다. 18여년에 걸친 군사 독재의 장기 집권, 특히 72년 유신 이후 7년여의 기간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민주?민권마저 철저히 유린된 시기였던 만큼, 억눌렸떤 민주화의 열망은 국민 누구의 가슴에나 북받쳐 오르고 있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