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영화미학과 가치관을 모색하는 일에 머리를 맞대며 뜨거운 마음과 마음을 교환해 나가는 은막의 파수꾼이 될 것임을 선언한다. 하길종 하는 기분을 감추지 않았던 인기작가 최인호의 원작 <바보들의 행진>(1975)은 대중영화의 방식으로 선회하는 그의 후기 영화를 결정지었다. 이에 당국은 시행령을 바꾸어 우수영화에 외화쿼터를 제공하는 보완책을 마련하지만, 김호선, <병태와 영자>(1979)는 미학적 새로움도, 홍파로 구성된 ‘영상시대’는 “프랑스의 영화이론가인 장 엡스땅이 ‘에뜨나 산 위에서 영화를 사고기로 했다”고 한 것처럼 ’서울의 남산 위에서 영화를 사고하기로 했다“고 표현한다(‘영상시대’의 사무실이 있었던 유현목 감독의 프로덕션이 남산에 있었다). 모든 동인들이 70년대 후반에 주도적 상업영화감독으로 변신해간 탓이다. 그후에 이어진 <여자를 찾습니다>(1976), 이장호, 아메리칸 뉴 시네마, 예술과 시장이라는 이원론적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영상시대’의 출범은 당시에는 돋보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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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기분을 감추지 않았던 인기작가 최인호의 원작 <바보들의 행진>(1975)은 대중영화의 방식으로 선회하는 그의 후기 영화를 결정지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대표작이 된 <바보들의 행진>(1975)은 70년대를 풍미했던 청년문화의 중심으로 들어가 캠퍼스 생활의 현실감을 다큐멘터리풍으로 그렸으며, 대학생 배우와 엑스트라들을 활용했다. 70년대식 좌절을 이상과 꿈으로 우회한 이 영화는 힘있는 사회풍자극으로 자리잡았으며, 하길종을 대학가의 영웅으로 부상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바보들의 행진>이 가져왔던 이중적인 성공이 그 후로는 또다시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후에 이어진 <여자를 찾습니다>(1976),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는 미학적 새로움도, 테마의 진실함도 확보하지 못했다. 오히려 흥행에서는 후기로 갈수록 안정세를 보였지만 점점 추락하면서 중상을 입게 되는 하길종의 영화정신은 그 자신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뇌출혈로 인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병태와 영자>의 흥행 성공 직후에 다가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의 안도와 또 한편으로의 착잡함 속에 머물렀을 그의 의식세계를 엿보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다정한 친구들을 늘 ‘피고’(시대적 방관자로서의 죄인이라는 뜻)라고 불렀다는 점과 후기로 갈수록 “다 그런 거 아니갔어”라는 너스레가 늘었다는 것은, 그를 잠식했던 시대적 채무감과 무력감을 읽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패배한 시네아스트이다. 그러나 그 패배가 어디서 왔는가를 감안하면 쉽게 타협했다는 질책으로 그의 후기를 비난 할 수만은 없다. 더욱이 그가 주장했던 영화의 사회적 기능은 대중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술과 시장이라는 이원론적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는 문제이다. 70년대 한국영화에 하길종이 불어 넣은 것은 영화 몇 편의 성과보다 지성과 비판정신의 바람이었다. 말년에 「뿌리 깊은 나무」에 연재한 그의 영화 비평들을 보면, 아직 일본에서 간행되는 영화책에 의지하고 있었던 국내 영화계에 누벨바그, 아메리칸 뉴 시네마, 또는 베르히만이나 빠졸리니, 구로사와나 사티야지트 레이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가 주축멤버가 되어 발족한 영화 동인 “영상 시대”는 단 두 권의 영화잡지를 내고 짧은 시간에 퇴색하고 말았지만 최초의 영화인 연대운동으로 한국영화 예술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요즘 같으면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 아니겠지만 당시에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서 어떤 단체를 결성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60년대의 황금기를 지나 텔레비전 보급이 본격화된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업 자체의 불황에 직면했던 한국영화계는 그 타개책으로 제정된 73년의 영화법 개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난립한 영화제작사를 허가제로 바꾸면서 영화자본의 독점화를 꾀하였고 한국영화제작에 외화수입쿼터를 제공하는 보상정책을 시행했다. 따라서 제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많았던 영화사들은 외화쿼터를 배정받겠다는 요식행위로 연간 의무제작 편수만 채웠기 때문에 ‘양의 팽창시대’와 ‘질의 빈곤시대’를 초래했다. 이에 당국은 시행령을 바꾸어 우수영화에 외화쿼터를 제공하는 보완책을 마련하지만, 이것은 소위 우수영화로 치부되는 문예영화를 양산하면서 대중과 한국영화의 거리감만 넓혀놓았다. 더불어 당시에는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영화 완성 후의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가위질이 존재하고 있었다.
‘영상시대’는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현실에서 태동한 의지의 몸짓이 분명했다.
‘영상시대’의 동인이었던 영화평론가 변인식은 프랑스 누벨 바그의 정신적 지주가 로베르 브레송이었듯이 ‘영상시대’의 뒤에는 사무실과 재정적 지원을 제공한 유현목 감독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 유현목은 예술파 감독으로 불리웠고 동인들 대부분이 그와 크고 작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 파리를 다녀온 유감독은 세느강의 좌편과 우편을 나누어 영화적 경향이 다른 두 파가 선의의 경쟁을 한다면서 우리도 충무로적인 기질과 그에 반대하는 기질이 조성될 필요가 있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래서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변인식, 이원세, 홍파로 구성된 ‘영상시대’는 “프랑스의 영화이론가인 장 엡스땅이 ‘에뜨나 산 위에서 영화를 사고기로 했다”고 한 것처럼 ’서울의 남산 위에서 영화를 사고하기로 했다“고 표현한다(‘영상시대’의 사무실이 있었던 유현목 감독의 프로덕션이 남산에 있었다).
1975년 7월 18일 서울 시내 무교동 중국음식점에서 발족한 ‘영상시대’의 선언문에서도 이들이 얼마나 전세계의 뉴 웨이브운동에 영향을 받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선언문은 한 여름에도 반팔을 입지 않았던 하길종 감독이 흰 양복 안에 검은 티셔츠를 받쳐입고 낭독했다.
-‘비키니 섬의 거북이’처럼 영화의 본질에서 벗어나 방향상실로 허덕여온 한국영화. 우리는 아직껏 이 땅에 영화는 있었어도 영화예술은 부재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책임의 소재를 아무에게도 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부재’의 책임을 미래의 우리들 스스로에게 묻고자 한다.(중략)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 이것은 구각을 깨는 신선한 바람, 즉 회칠한 무덤 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이어야 한다. 과연 이 땅에서 단한 번의 ‘누벨바그’나 ‘뉴 시네마’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때문에 여기 여섯의 ‘영상공화국’ 주민은 서로 다른 개성을 통한 ‘젊음의 구도’를 제시할 것이며, 새로운 영화미학과 가치관을 모색하는 일에 머리를 맞대며 뜨거운 마음과 마음을 교환해 나가는 은막의 파수꾼이 될 것임을 선언한다.-
‘영상시대’의 출범은 당시에는 돋보이는 행보였지만 정작 하길종 자신에게는 큰 힘이 되진 못했다. 모든 동인들이 70년대 후반에 주도적 상업영화감독으로 변신해간 탓이다. 하지만 78년 계간지 「영상시대」여름호를 발행할 때까지 만4년 동안 전개된 ‘영상시대’의 영화운동에는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신인배우와 연출지망생들의 공개모집과 더불어 맑은 피의 수혈에 대하여 인색했던 충무로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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